안녕하세요?
문학을 읽고 요약하는 경이 입니다.
오늘은 브로호 『베르길리우스의 죽음』 책을 읽고 개인적인 생각을 올려보고자 합니다.
브로호의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단순히 한 시인의 죽음을 다루는 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은 인간이 언어로 진실을 전하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자, 예술가가 자신이 만든 세계 앞에서 느끼는 양심의 고통을 그린 철학적 기록이다.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총애를 받으며 ‘아이네이스’를 완성한 후, 생의 끝자락에서 그 원고를 불태우려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베르길리우스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예술의 의미’를 끝없이 되묻는다.
과연 시는 진실을 담을 수 있는가, 아니면 권력의 장식물로 전락하는가.
브로호는 이 내면의 투쟁을 마치 음악처럼 길고 복잡한 문장으로 그려낸다.
읽는 내내 문장은 파도처럼 밀려오고, 그 속에서 인간의 언어가 얼마나 무력하면서도 숭고한지를 느끼게 된다.
이 작품은 베르길리우스라는 인물보다, ‘말하는 인간’ 전체의 운명을 이야기한다.

권력 앞에서 흔들리는 예술가의 양심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의 중심에는 예술가의 양심이 놓여 있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를 통해 로마 제국의 영광을 노래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작품이 황제의 선전물처럼 읽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이 의도했던 시의 진실이 권력의 언어에 이용당하고, 자신의 시가 타인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된다는 두려움이 그를 괴롭힌다. 그래서 그는 작품을 불태워야 한다고 결심한다.
이 결정은 단순한 자기부정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의 본질을 되찾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다.
브로호는 이 장면에서 예술가가 현실의 부패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순수한 윤리적 결단’을 보여준다.
베르길리우스의 고뇌는 모든 시대의 예술가들이 맞닥뜨리는 질문이다.
작품은 사회적 영향력을 가져야 하는가, 아니면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켜야 하는가.
브로호는 이 질문을 단정적으로 답하지 않는다. 대신 베르길리우스의 내면 독백을 통해, 진실한 예술은 권력과 거리를 두려는 고독 속에서 태어난다고 암시한다.
이 대목은 현대 독자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예술이 상업과 홍보의 도구로 변질되는 시대, 작가는 여전히 베르길리우스의 불안을 반복하고 있다. 진실을 말하고자 하지만, 세상은 그 진실을 상품으로 만든다. 브로호는 그런 모순을 예언하듯 꿰뚫는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예술가의 양심’을 향한 선언처럼 읽힌다.
언어와 침묵의 경계에서 — 존재의 심연을 응시하다
베르길리우스가 죽음을 앞두고 느끼는 가장 큰 공포는 ‘언어의 한계’다.
그는 평생 시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했지만, 이제는 단어 하나조차 믿을 수 없다.
언어는 진실을 표현하기엔 너무 좁고, 현실을 왜곡하기엔 너무 강력하다.
브로호는 이러한 모순을 ‘죽음의 문턱’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 배치한다.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의 시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것이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면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그는 언어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오히려 침묵 속에서 구원을 찾는다.
이 대목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사상과도 닮아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베르길리우스는 말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지만, 결국 그 한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언어를 초월한 ‘침묵의 영역’은 죽음의 상징이자, 동시에 영원의 문턱이다.
브로호는 이를 매우 시적으로 묘사한다. 베르길리우스가 병든 몸으로 항구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언어는 더 이상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존재의 울림으로 변한다.
독자는 마치 한 편의 교향곡을 듣는 듯한 리듬감 속에서, 인간이 언어로 세상을 붙잡으려다 결국 그 언어에 삼켜지는 비극을 느낀다. 브로호는 언어의 무력함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 무력함 속에서 피어나는 진실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침묵은 패배가 아니라,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순수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죽음과 구원의 역설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결국 ‘예술의 죽음’을 통해 ‘예술의 구원’을 말한다.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이 쓴 작품을 불태우려 하지만, 그 행위 자체가 역설적으로 예술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길이 된다.
그는 불완전한 작품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 파괴를 선택한다. 그 순간, 예술은 육체적 결과물에서 벗어나 ‘정신의 진실’로 승화된다.
브로호는 예술이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완성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한계와 죽음을 인식할 때, 예술은 오히려 영원성을 획득한다.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곧 언어의 소멸이지만, 그 침묵 속에서 예술의 본질이 새로이 태어난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예술이란 결국 구원에 이르는 고통의 과정’이라는 생각을 했다.
진실을 향해 가는 길에는 늘 상처와 고독이 따른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고통을 끝까지 감내한 예술가다.
그는 권력의 찬사보다 양심의 평화를 택했고, 언어의 영광보다 침묵의 진실을 선택했다.
이 결단은 단지 한 시인의 생애를 넘어서,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도덕적 문제로 확장된다.
우리가 무언가를 창조하고 표현할 때, 그 행위는 얼마나 진실한가.
브로호는 독자에게 이 질문을 남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작품을 덮은 뒤에도 오래 남아, 삶의 방향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인간이 예술을 통해 진실에 다가가려는 시도의 극한을 보여준다.
베르길리우스는 언어의 무력함을 깨닫고 작품을 불태우려 하지만, 그 절망 속에서 오히려 예술의 순수성이 빛난다.
브로호는 죽음을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예술이 완성되는 마지막 과정으로 그린다.
언어의 종말은 동시에 영혼의 탄생이며, 예술의 침묵은 오히려 영원의 울림이 된다.
읽는 동안 나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했다.
단순한 표현의 기술이 아니라, 진실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정신의 여정. 그 여정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바로 그 고통이 인간을 예술가로 만든다. 베르길리우스의 마지막 하루는 곧 모든 인간이 언젠가 맞이할 내면의 심판이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아이네이스’를 품고 살아가며, 언젠가 그것을 불태울 용기를 배워야 한다.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그렇게 우리 모두의 양심에 불을 지피는 작품이다.
브로호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예술가의 양심과 존재의 마지막 이유랄까요? 정말 내가 살아가는 방향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그럼, 다음 글에서 또 만나요.